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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북3.20독립운동기념사업

군북3.20독립운동은

항일운동의 계승은 “차가운 돌에 새기는 비명(碑銘)”으로 결코 완수되지 않으며, “후손들의 마음의 비명(碑銘)으로 살아 있어야 한다.

(군북3.1독립운동사   p.142)
1. 역사적 배경

- 군북3.20독립운동은 함안읍의 3.19독립운동과 연속선상에서 전개된 운동이다. 함안읍의 3.19독립운동과 마찬가지로 군북3.20독립운동도 유림세력들이 주도하여 일어났다. 군북3.20독립운동 주모자들은 서산서당, 신창야학교 등을 거점으로 삼아 동지를 규합하여 독립만세 운동을 계획하고 독립선언문의 개작과 태극기를 제작하는데 앞장섰다. 이들의 주도하에 펼쳐진 군북3.20독립운동에는 신창야학교 교사, 군북면사무소 직원 등이 다양하게 참여했다.

2. 동지들 모여들고

- 최초 군북에서 군북3.20독립운동을 도모한 날은 1919년 3월 5일경이었다. 독립선언문을 비밀리에 간직하고 함안면 봉성동의 조한휘, 동명학교 교사인 검안리의 이희석, 여항면의 박노일 등과 함께 군북3.20독립운동을 논의했다. 3월 19일 함안 장날을 기점으로 거사하기로 합의한다. 조상규, 조경식, 조주규, 조석규, 조형규, 조용섭, 조용규 등은 함안 장날 시위 후 3월 20일 군북에서도 만세 시위를 벌일 것을 결의한다.

3. 3.20군북천의 만세함성

- 군북3.20독립운동은 2단계로 나누어 시위를 준비했다.
1단계 : 1919년 3월 20일 오전 9시경, 군북3.1독립운동 주동자인 조상규 등은 신창야학교 교정에서 학생 50여 명과 함께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대한독립만세를 불렀다.
2단계 : 12시경 군북 장터에 모여 대규모 시위를 준비했다. 예상보다 많은 3천여 명의 시위 군중이 모여들어 군북 냇가로 장소를 변경하였다. 태극기와 독립선언전단을 배포하고, 1시 정각 조상규가 둑 위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조용규가 대한독립만세를 선창하자 만세 함성은 백이산에 메아리쳤다. 신창, 소포, 덕대, 안도를 순회하며 독립만세를 외쳤다. 만세시위에 합세한 군중이 5천여 명으로 불어났다. 오후 2시경, 군북우체국과 군북면사무소를 거쳐 군북경찰주재소를 포위하여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4. 죽음을 넘어

- 시위에 참여한 군중들은 군북 경찰 주재소를 포위하고 계속 시위를 벌였다. 충돌이 일어나자, 일본 군경은 주동자를 골라 조준사격을 가했다. 조용규를 비롯한 시위군중 40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특히 김삼도, 김우곤, 나수범, 박상엽, 박원개, 박주범, 박학숙, 송문호, 이경민, 이경흠, 이원필, 이재형, 조성기, 조성술, 조용규, 조용대, 조용섭, 조용태, 조주규, 조호진등 20명은 군북3.20독립운동 중 현장에서 순사한다. 3월 20일 전개된 군북3.20독립운동의 특징은 아래와 같다.
1) 3월 19일 함안읍 3.19독립운동과 거의 동시에 계획 · 전개.
2) 14일이라는 오랜 기간 동안 비밀을 유지하면서 주도면밀하게 준비.
3) 군북3.20독립운동의 주도세력이 지역의 유지.
4) 그 어떤곳보다 치열하게 전개되어 현장에서 순절한 인물이 많음.

5. 잃은 것과 남긴 것

- 일제 관헌의 공식적인 기록과 조사에 의하면 군북3.20독립운동 과정에서 일본 군경이 쏜 총탄은 위협사격이 20여발, 조준사격이 40여발인 것으로 추정된다. 시위 군중의 사상자 수는 사망 22분, 부상 18분 모두 40분으로 3.1독립운동 기간 중 전국에서 다섯 번째로 많은 희생자를 낸 치열한 의거가 바로 군북3.20독립운동이다.

  • 앞으로 사업회는

    기념의 주체와 형식에서 군북 면민들이 광범위하게 참여할 수 있도록 한다. 기념사업 및 기념공원의 생활화가 진척. 기념의 형식도 특정한 유지 위주의 기념식 외에 다양한 방식으로 주민, 미래세대인 학생들에게 근접할 수 있는 다양한 형식으로 개발, 운영하려 한다.

<출처 : 군북3.1 독립운동사 .2004>